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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축성을 이끈 정조가 1776년 숭정문에서 즉위한 지 올해로 250주년을 맞았다. 격변의 시대 속에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20년 무렵 국정 운영의 기틀을 다지며, 자신이 꿈꾸던 이상 국가의 청사진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기존 한양의 틀 안에서는 개혁 의지와 정치적 비전을 온전히 구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담아낼 공간을 구상했는데, 그게 바로 수원화성이었다. 1796년 화성을 완공했으니, 올해는 수원화성 축성 230주년이 되는 해다.

1789년 10월, 정조는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화산으로 옮기고 ‘현륭원’으로 격상했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아버지 명예를 회복하고자 명당에 능원을 조성한 것이다. 이에 따라 수원부 읍치도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고, 수원화성을 축성했다. 단순한 묘 이장을 넘어 새로운 도시 질서와 이상 국가를 세우려는 정조의 정치적 결단이 담긴 대역사였다.

정조가 수원을 주목한 이유는 오래전 고산 윤선도가 지세의 길함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수원의 산과 지형에 대한 논의는 기해년(1659, 효종10) ‘효종영릉천릉도감의궤(孝宗寧陵遷陵都監儀軌)’에 실려 있는 윤강(尹絳), 유계(兪棨), 윤선도(尹善道) 같은 사람들과 홍여박(洪汝博), 반호의(潘好義) 등 술사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시말은 윤강의 장계와 윤선도의 문집에 실려 있는 ‘산릉의(山陵議)’, ‘여총호사서(與摠護使書)’보다 더 상세한 것이 없다. 내가 수원에 뜻을 둔 지 이미 오래되어 널리 상고하고 상세히 살펴본 것이 몇 년인지 모르겠다.

‘홍재전서’ 기록이다. 윤선도는 효종 승하 후 왕릉 선정에 참여하여 수원을 길지로 추천하였으나, 송시열 등 서인들의 반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30년이 지나 정조는 윤선도가 추천한 곳이 명당임을 알고 아버지 묘를 그곳으로 이장했다.

윤선도는 시문학의 대가로 풍수에도 깊은 식견을 지녔다. 효종의 왕릉 자리를 정하는 데 참여할 만큼 풍수 실력이 대단했다. 말년에 머물렀던 보길도와 금쇄동도 풍수지리를 살펴 정했다.

윤선도의 수원 평가는 오랫동안 전해 내려왔다. 정조가 그 안목과 뜻을 받아들여 수원을 새로운 정치와 이상을 펼칠 터전으로 삼았다. 이는 풍수적 인식과 시대적 비전이 함께 어우러진 결정이었다. 수원은 우연히 선택된 땅이 아니라, 오랜 세월 축적된 풍수적 평가 위에 정조의 정치적 구상이 더해지며 새롭게 빛을 발한 공간이 되었다.

윤선도와 수원 인연은 이보다 앞선 시기에도 있었다. 그는 왕자사부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쳤다. 사부는 원칙적으로 다른 관직을 겸할 수 없었지만, 왕의 특명으로 벼슬과 사부를 함께 맡았다.

훗날 봉림대군이 임금이 되니 곧 효종이다. 효종은 국왕이 되고도 스승 윤선도를 향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그 고마움을 전하고자 특별히 수원에 집을 지어 하사했다. 그 집은 임금의 마음이 깃든 선물이었다. 윤선도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기둥과 대들보 하나하나를 풀어 배에 싣고 남쪽 해남으로 옮겼다. 그 집이 바로 오늘날 해남윤씨 종가로 전해지는 녹우당이다. 임금이 스승에게 바쳤던 마음과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려 했던 한 선비의 정이 여전히 머물러 있다.

이런 윤선도에게 정조는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다. 조선 시대는 왕명으로 문집을 간행한 사례가 제법 있는데, 윤선도 문집 ‘고산유고’도 여기에 든다. 윤선도 서거 120년 후인 1791년(정조 15) 전라감사 서유린(훗날 수원부 유수를 지냄)은 정조 명을 받고 문집을 간행했다. 그 뒤 정조 22년 전라감사 서정수는 윤선도의 본가에 간직된 목판본을 대본으로 하여 개편, 간행한 것이 오늘날 전하는 ‘고산유고’다.

정조는 학문을 숭상하고 문치를 강조한 군주다. 그러다 보니 규장각을 설치하고 학문적 가치가 높은 문집들을 간행했다. ‘고산유고’도 그런 차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홍재전서’ 기록 등으로 볼 때 고마운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정조는 윤선도 후손들을 수원으로 불러오기도 했다. 1786년 1월 22일 조회에서 박제가가 정조에게 건의한 기록(‘일성록’)이 전한다. 그때 박제가는 “지금 나라의 큰 폐단은 가난인데, 어떻게 하면 가난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하면 중국과 통상하는 길뿐입니다.”라며, “수로와 육로로 교통하며 장사하는 일에 사족들이 입적하는 것을 모두 허락하여, 혹 비용을 마련해서 빌려주거나 점포를 설치하여 지내게 하거나……”라고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인용문에는 전부 담지 못했지만, 이 주장의 요지는 양반(사족)이 늘어나며 무위도식하는 계층이 증가해 과거 시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상업·경제 활동에 참여하도록 허용해 놀고먹는 풍조와 특권 의식을 줄이자는 제안이었다.

수원은 한양과 삼남 지방(충청·전라·경상)을 연결하는 교통 핵심 요지로 상업 활동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런 점을 살려 정조는 수원을 군사적 요새를 넘어, 상업 중심지로 육성하고자 했다. 특히 중국과 교역할 수 있는 상업체계를 꾸리고 싶었다. 이렇게 큰일을 위해 양반 상인이 필요했다. 그때 등장한 것이 고산 윤선도 후예들이었다.

정조실록(정조 14년, 1790. 12. 8.)에 해남에서 윤지운, 윤지섬, 윤지홍, 윤지익, 윤지식, 윤지상, 윤지민이 수원으로 와 정착하고 과거 시험을 보아 정조가 기뻐한 내용이 나온다. 당시 수원 부사 조심태에게 “돈 1천 냥을 특별히 떼어주니 경이 직접 관리하여 혹은 집을 사주기도 하고 물건을 사주기도 하여 곧 즐비한 집들이 마을을 이루게 하라.”라고 전교를 내린다. 지금도 팔달문 밖에 9개 시장이 밀집해 있는데, 이는 그때부터 시작된 역사다.

윤선도는 효종의 사부였지만, 효종 사후 정치적으로 몰락했다. 이로 인해 해남윤씨들은 정조대까지 정치적으로 중용될 수 없었다. 과거에 합격하고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양반 신분으로 지역에서 어업 행위를 크게 하고, 해산물을 유통하였다. 간척사업으로 농토를 넓히고 둔전을 개발하며 살았다. 이러한 실용 정신이 바탕이 되어 양반 집안이면서 수원으로 이주하여 정조의 상업 정책에 참여한 것이다.

역사와 문화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수원의 밑바탕에는 시대와 함께 이어 온 묵직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윤선도가 내다본 길지의 의미 위에, 정조는 치밀한 구상과 강한 실천력으로 새로운 도시의 청사진을 펼쳐 나갔다. 백성이 풍요롭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이상 도시를 꿈꾸며 새로운 도시 질서를 설계했다. 그 과정에는 삶의 터전을 일군 백성들의 땀과 희망도 함께 쌓였고, 사람의 이야기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이야기는 오늘의 삶 속에서 울림을 전하고, 그 서사가 다시 미래를 비추는 힘이 된다.

출처 : 수원일보 - 경기·인천 최고의 디지털 뉴스(http://www.suwonilbo.kr)

 윤재열  /  수필가,    (재) 윤고산장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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