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무는 시기에 ‘고산 윤선도 박물관’에서 《고산유고》를 봤다. 윤선도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91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정조의 명을 받고 간행했는데, 우리 문학사에 빛나는 시가가 실려있다. 윤선도의 시조가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의 교실에 닿을 수 있는 것도 《고산유고》 덕분이다.
이 책에는 상소문 <병진소>가 있다. 상소문은 이제 과거의 문서로만 읽힌다. 이미 끝난 시대의 정치 언어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천천히 읽다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 글은 단지 조선 후기의 한 장면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임을 깨닫게 된다.
고산의 <병진소>는 1616년 광해군 8년에 썼다. 당시 이이첨은 조정에서 권력을 쥐고 전횡을 휘두르고 있었다. 견제받지 않는 강력한 힘으로 부당한 횡포를 획책하고 있었다. 이이첨을 정점으로 한 정치 권력의 남용에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는 정세였다.
이때 윤선도가 이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나이 30세였다. 특별한 벼슬이 없는 생원에 불과하지만, 17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했고, 20세에 승보시 장원을 했다. 26세에는 진사시 장원에 합격한 신진 관료로 장래가 기대되는 엘리트 관료였다. 하지만 이 상소문은 임금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조정을 질식시킨 무리를 처벌하고자 올렸는데, 그 무리가 중간에 가로챘다. 위협을 느낀 세력은 결국 고산을 모함하고,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했다. 상소문 하나로 젊은 선비에게 17년이라는 가혹한 칼날을 내리쳤다.
<병진소>는 예조판서 이이첨의 권력 남용을 정면으로 지적하는 데서 출발한다. 신하가 불초하면 국정 또한 바르게 설 수 없다고 단언하며, 정치 타락은 인사 문란에서 비롯된다고 짚는다. 과거 시험이 공정하지 않다는 소문은 이미 일상적인 화제가 되었고, 별시 전시 급제자 가운데서만도 십여 명이 연루되었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특히 이이첨의 네 아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과거에 급제한 사실을 문제 삼으며, 권세가 혈연을 통해 제도를 잠식하는 현실을 날카롭게 폭로한다. 풍문을 넘어서, 자신이 직접 겪은 구체적 사례를 들어 부정을 고발한다.
선조 승하 후 조정은 왕권 계승을 두고 영창대군과 광해군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적자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결국 광해군이 왕이 됐다. 이로 인해 광해군 지지했던 이이첨은 하루아침에 일등 공신이 되었다. 광해군은 정국 안정을 위해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613년 계축옥사를 거치며 영창대군은 죽음을 맞았고, 인목대비는 유폐되었다. 이 과정에서 권력은 이이첨에게 과도하게 집중되었고, 조정은 점차 방향을 잃어갔다.
이들의 비행을 알리는 상소는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었다. 상소문 말미에 “(신의 아비는) 아들이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엾어 우두커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적었다. 이 한 문장에는 고산은 물론 자신의 아버지도 그 끝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음이 담겨 있다. 그러함에도 아비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나서는 아들의 뜻을 막지 않았다. 고산의 충정은 두려움을 넘었고, 아버지의 침묵은 비장한 허락이 되었다.
고산은 “전하께서는 오늘날을 잘 다스려지는 때라고 보십니까. 혼란한 때라고 보십니까?”라고 묻는다. 비판 대신 질문을 선택했지만, 이는 통치가 어그러졌음을 에둘러 말한 것이다. 최후통첩에 가까운 직언도 서슴없이 한다. 이이첨은 물론 박승종과 유희분 죄도 함께 다스려야 한다고 간청했다. 이들은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은 채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감히 무너뜨릴 수 없는 산이었는데, 곧은 생각으로 밀어붙였다. 거기서 나오는 문장 하나하나는 활시위를 힘껏 당겨 쏜 화살 같았다. 활은 부패와 비리의 한복판을 꿰뚫듯 거침없었다.
지금 다시 돌아보아도 고산의 상소는 지나칠 만큼 무모한 항변이다. 그에게는 권력도 등을 맞댈 정치적 기반도 없었다. 결과도 예견된 것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불공정의 풍경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국면은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남은 것은 다수의 침묵과 애써 외면하는 시선뿐이었다. 고산은 기득권의 힘으로 밀려나고, 고립의 끝으로 내몰렸다.
고산의 당시 상황을 오늘날과 평면 비교하기 어렵지만, 지금도 이른바 ‘입틀막’이라는 현상은 반복된다.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제도적으로 있지만, 실제로는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구조적 억압이 존재한다. 이런 현상은 물리적 폭력 없이도 충분히 강요된 침묵을 만들어낸다.
오래된 상소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과거를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의 언어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고산의 상소는 당대에는 실패로 기록되었다. 뜻을 이루지 못했고, 현실도 바로 잡지 못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의 언어는 실패를 넘어 살아남았다. 시대에 편승한 언어들은 빠르게 소멸할 때, 오랜 세월에도 마모되지 않고 빛나고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 언로의 원형이 아닐까. 특히 개인의 안위보다 국가의 도리와 백성의 삶을 먼저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뜨겁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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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열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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