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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정치 떠나 형식에 얽매지 않은 고산 윤선도... 한글 시조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다

 

한류 열풍이 거세다. 드라마에서 시작해 음악,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가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요즘은 드라마 속 패션에 김밥, 떡볶이 등 먹거리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급기야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하면서 문화 강국에 정점을 찍었다.

우리 문화에 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옮겨간다. 세계 각국에서 한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렇다. 한국 문화 핵심 요소에는 한국어와 한글이 있다. 이를 매개로 한류 콘텐츠가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윤선도는 어떻게 한글 시조를 남겼을까
윤선도는 어떻게 한글 시조를 남겼을까 ⓒ kimibmoon on Unsplash


과거 우리는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하지만 기록은 한문으로 남기는 이중생활을 했다. 시조도 그렇다. 고려 중기 때부터 즐긴 문학이었지만, 기록 없이 입으로만 전해졌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에도 사대부는 입으로는 우리말로 멋들어지게 시조를 읊고도 기록은 한문으로 했다. 당시 한문은 특권층의 도구였다. 자신들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평민층과 차이점을 강조하는 기호였다. 따라서 항구적인 권력 독점과 유지를 위해 한자와 한문을 사용했다.


이런 문자 이데올로기를 거부한 사람이 고산 윤선도다. 고산은 32세(1618년)에 유배지 함경도 경원에서 한글로 '견회요' 5수와 '우후요' 1수 등을 쓴다. 56세(1642년)에는 금쇄동에서 연시조 형식의 <산중신곡>을 썼다. 여기에 '오우가' 등 한글 시조 18수가 있다. 그리고 65세(1651년)에는 '어부사시사' 40수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렇게 생전에 총 75수의 한글 시조를 남긴다.

15세기에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했다. 하지만 훈민정음의 실질적 사용은 확장을 이루지 못했다. 주류 문자 한문에 밀려난 훈민정음은 16~17세기에 궁중과 양반가 여성들 중심으로 쓰이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우리 문자사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이 시기에 윤선도 한글 시조가 있다. 한글 시조는 한문 문화에 짓눌려왔던 겨레의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게 피어 있다.

고산은 15세에 한시를 짓기 시작해 타계하기 전 83세까지 한시를 남겼다. 7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려 259편이나 되는 작품을 남겼다. 이 밖에 <고산유고>에 상소문과 제문(祭文), 기(記), 서(序), 잡저(雜著), 편지글까지 모두 한문 산문이다. 이 정도면 평생 한문으로 생활을 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끔 한글 시조를 남길 수 있었단 이유는 뭘까. 고산은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은 강직한 선비다. 그로 인해 정치적 탄압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고 귀양을 갔다. 유배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몸이 되어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그는 중앙 정치권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신분이 자유로우니 형식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다. 이는 문자 사용에도 적용됐다. 지배층이 쓰는 한문을 제쳐 놓고, 한글을 편하게 쓸 수 있었다.

윤선도는 친척과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쓴 '견회요'도 백성의 어려운 삶을 걱정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말년에는 진도 지역에서 간척지를 일궈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했다. 고산 한글 시조도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가서려는 성품과 연결된다.

사대부로서 갖는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소외된 사람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평범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정신 세계는 유연성으로 나타났다. 그들과 쌍방향 소통 실현을 위해 한문만 고집하지 않고 한글 시조를 선택했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도 그것이 일부 특권층만 즐기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 고산 작품은 그런 면에서 더 의미가 있다.

윤선도 문학은 삶의 이야기다. 고향 산천에서 지내면서 혹은 보길도라는 삶의 현장에서 체험을 바탕으로 썼다. 그러니 위선적인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사철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외부의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여유가 있다. 삶이 여유로운 사람의 노래는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넘친다. 자연 친화적인 태도와 개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는 한글 시조가 제격이었다. <훈민정음> 정인지 서문에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자가 있다"라고 한 것처럼 고산은 여기저기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한글로 적었다.

고산은 평생 한문과 중국의 고전만 읽었다. 그렇다면 한글은 몸에 맞지 않는 의복처럼 어색할 만하다. 그런데도 고산은 한글 표현 능력이 뛰어나다. 이는 한시를 자유자재로 쓰는 것처럼 문학적 소질도 있겠지만. 한글 익히기와 쓰기에도 개인적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 행위는 지적 선택이었으며, 모국어의 가치를 깨달은 실천이었다.

고산의 시는 영원히 빛나는 한글 미학의 결정체라고 하듯, 17세기 조선 문자 역사를 온전하게 채워주는 작품이다. 당시 사람들은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지금도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깊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수필가   윤 재 열    (윤고산장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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